인천평강교회 박희정목사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권세가 있다. 이 십자가의 피가 마귀를 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심판이 있기 전에 아직 마귀가 할 수 있는 것이 딱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거짓말이다. 그 거짓말을 통해서 지금도 이 세상을 조종하고 지배하려고 한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100% 속을 수밖에 없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빚이 되시기 때문에 그 모든 거짓을 드러나게 하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 속할 때 그 거짓은 우리를 속일 수 없다. 그래서 말씀을 끊임없이 배우고, 묵상하고 말씀 안에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 말씀이 내 발의 등이 되어 어둠을 비춰주고 어디로 가야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지, 어디로 가야 함정에 빠지지 않을지, 어디로 가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을지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
죽음이 두려운가?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다. 죽음을 맞이할 때의 고통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제일 복된 죽음은 자다가 평온하게 가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나는 매일 밤 죽음을 연습한다. ‘주님~, 오늘 이 밤이 마지막이라고 하신다면 내가 이렇게 자다가 깨어나지 못한다면 얼마든지 언제든지 부르시면 달려가겠습니다. 다만 우리 연약한 성도들과 자녀들을 기억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주시고, 온전히 믿음 안에서 살게 하셔서 영원한 천국에서 반드시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지켜주십시오. 남들보다 좋은 집에서 못 살고 많은 연봉 못 받아도 늘 믿음 안에서 살고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신령한 축복을 감추지 마시고 믿음의 신비와 날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 주십시오. 오직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 은혜 누리게 해 주소서. 진짜 행복을 누리게 해 주소서~.’
이렇게 죽음을 연습한다(고전 15:31).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가까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자유함을 얻었다. 이제 그 죽음 때문에 한평생 종노릇했던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의 종이 아니다. 우리는 부활의 씨앗을 품고 있으며 이미 영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분의 죽음은 그 어떤 것도 막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분은 죽으러 오셨고 죽음과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공포와 슬픔이 십자가 앞에 넘쳤으나 그 공포와 슬픔보다 더 큰 것은 바로 그 사랑, 그 사랑의 크기가 더 컸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능히 그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이다. 이에 관한 말씀이 아가서 8장 6~7절에 등장한다. ‘너는 나를 도장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이것이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심히 고민하고 극도의 아픔과 슬픔에 빠져있지만 그것을 압도할 만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은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지옥이 불같이 일어나도 진정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우리 주님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 없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이 말씀 안에서 ‘날 위해 죽으신’이라는 고백이 흘러나왔다. 보통은 십자가의 구원이 모든 인류를 위해서라고 복수로 표현하지만 바울은 단수로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나를 찾아오신 그 사랑이다.
우리가 모두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그 사랑을 경험하며 나의 예수님. 나의 노래로써 고백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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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라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