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단지 117년…사라진 손가락, 남겨진 가족의 디아스포라

▲ 사진출처=Wikimedia Commons

1909년 2월,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의 한 여관. 엄동설한 속에 모인 열두 명의 청년은 왼손 약지 한 마디를 자르고 흐르는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을 새겼다. 이른바 ‘단지동맹’을 이끈 이는 훗날 하얼빈 의거를 감행한 안중근이었다.

안중근은 일본 경찰의 심문에서 단지의 이유를 묻자 “조국이 독립할 때까지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겠다는 결의이자, 국가를 위한 충정을 보이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그의 결기는 8개월 뒤 이토 히로부미 저격으로 이어졌고,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1910년 3월 25일, 형 집행을 하루 앞둔 안중근은 동생 정근과 공근을 불러 “블라디보스토크의 이치권에게 맡겨둔 의복과 손가락 등을 찾으라”는 유언을 남겼다. 단지한 손가락은 의거 직전 머물렀던 지인의 집에 보관돼 있었다.

이후 1911년경 동생 안정근은 단지동맹에 참여했던 백규삼으로부터 손가락과 혈서 태극기를 전달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잘린 손가락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에게 신화적 상징이 됐다. 미주 한인 사회가 재판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제작한 엽서에 단지 사진이 실렸을 정도로, 그것은 결의와 희생의 표상이었다.

안정근은 형의 유지를 이어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청산리대첩에 참여하고 임시정부 활동에도 몸담았다. 가족의 회고에 따르면 안정근의 아내는 “안중근의 손가락을 허리춤에 묶고 다녔다”고 전했다. 단지는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신념의 증표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한 안정근이 1949년 중국 상하이에서 지병으로 별세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그의 유해는 상하이 만국공묘에 안장됐지만, 중국 내전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묘소가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와 함께 보관됐던 안중근의 손가락 역시 자취를 감췄다.

해마다 3·1절과 광복절이 돌아오면 안중근 유해 발굴 필요성이 제기되지만, 학계는 현실적 난관을 지적한다. 장기간의 전란과 사회 변동 속에서 관련 자료가 소실됐고, 정확한 매장 위치를 특정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안중근 일가의 서사는 영웅담에 그치지 않는다. 학계는 일제강점기 동안 40여 명의 가족이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만큼 일제의 감시와 탄압도 집요했다.

장남 분도(본명 문생)는 어린 나이에 일제 밀정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차남 준생은 일제의 회유에 굴복해 친일 행적을 남겼고, 광복 후 사회적 지탄 속에 은둔했다. 동생 공근은 한인애국단 활동 이후 임시정부 내부 갈등에 휘말려 1939년 실종됐다.

해방 이후 좌우 이념 갈등과 분단은 가족을 더욱 갈라놓았다. כיום 안중근의 후손들은 남북한은 물론 중국, 미국, 남미 등지에 흩어져 조용히 살아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운동가 가문의 ‘디아스포라’가 10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2000년 이후 국가 주도로 안중근 유해 발굴이 두 차례 추진됐지만 성과는 없었다. 해외에서 생을 마친 가족들에 대한 체계적 조사도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독립운동사 연구자들은 이제 시선을 넓혀야 한다고 말한다. 단지의 행방을 찾는 일 못지않게, 흩어진 가족사를 복원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안중근의 손가락은 여전히 찾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질문은 현재진행형이다. 한 영웅의 상징을 넘어, 근현대사의 격랑 속에 흩어진 가족 공동체를 어떻게 기억하고 복원할 것인가 하는 과제가 우리 사회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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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봉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