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선교문학 선교회 대표 나은혜 목사
대전 임마누엘교회에서 ‘함해노회교역자수련회’가 열렸다. 대구까지 가야 하는 나는 대전을 거쳐 대구로 스케쥴을 잡으면 되었다. 서울에서 대구는 KTX로 한시간 조금더 걸리는 거리이다. 그런데 기차 좌석표가 없어서 입석표를 끊었다.
기차 통로 양쪽에 보조의자가 있어서 통로로 나왔더니 양쪽에 군인이 앉아 있다. 그중 한 군인이 나를 보더니 벌떡일어나며 “여기 앉으세요.” 한다. 나는 “아… 괜찮은데… 고마워요.” 하고 사례하며 보조의자에 앉았다.
너무 오랫만에 와보는 대전역이다. 동광장역에는 스타리아를 가지고 마중나온 오늘모임장소를 제공한 김목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KTX가 오늘따라 도착시간을 10분이나 훌쩍 넘겨서 기다리는 분에게 매우 미안했다.
덕분에 오늘 모임장소로 편안하게 잘 갈 수 있었다. 교회 맞은편에 쭈꾸미요리를 잘하는 집이 있어서 우선 그곳에서 모두 식사를 했다. 그 식당은 원래 오늘은 쉬는 날이었는데 김목사님의 부탁으로 우리(교역자모임)를 위해 특별히 음식을 준비했다고 하니 참 감사했다.
점심을 먹고 임마누엘교회로 가서 먼저 예배를 드렸다. 임마누엘교회는 아담하고 실용적으로 잘 지어진 교회였다. 예배후에 임마누엘교회가 준비한 간식(과일, 피로회복제)을 하나씩 받아서 장태산자연휴양림으로 출발했다.
30분쯤 걸려 도착한 대전팔경중 하나라는 ‘장태산자연휴양림’은 그야말로 피톤치드가 가득한 숲으로 유명하다더니 과연 그런것 같았다. 쭉쭉뻗은 미국에서 수입해서 심었다는 메타세쿼이아(Metasequoia 또는 dawn redwoods) 나무들은 보기만해도 시원했다.
장태산의 나무로 만들어 놓은 스카이타워와 스카이웨이를 올라가서 숲을 바라보는 기분도 아주 상쾌했다. 우리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 장태산자연휴양림의 일부만 둘러보았지만 피톤치드(phytoncide)가 가득한 좋은공기를 마시면서 걷는것만으로도 충분히 힐링이 되는것 같았다.
그런데 대천 해수욕장 근처에서 목회하는 목사님 부부를 산책중에 만났다. 사모님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나목사님이세요? 저도 나씨예요.” 사모님은 나와 띠동갑으로 나와 이름 가운데 글자 하나만 다른 이름을 가진 분이었다. 우리는 동시에 얼싸안고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동안 한번도 만난적이 없어도 같은 성씨라는 것만으로도 이처럼 친근감을 느끼다니 참 혈통이란 놀라운 것이다. 사모님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고 대천해수욕장에 꼭 놀러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역시 서울 올라오면 김포에 있는 우리 선교회에 꼭 들려달라고 했다.
우리 일행은 산을 내려오다가 모두 카페에 들려서 차를 마셨다. 일부는 씨앗호떡을 파는곳에 들려서 호떡을 사서 먹었다. 호떡을안먹고 먼저내려온 사람들에게 카페로 가져다 주었다. 달콤하고 쫀득한 호떡의 맛은 산행을 한 우리에게 훌륭한 간식이 되어 주었다.
교역자 수련회는 오후 4시쯤해서 모두 마쳤지만 나에겐 가슴설레는 또 하나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나의 육촌여동생을 만나기로 한 것이다. 중앙로 NC백화점까지 아침에 기차역까지 나를 맞이해 주었던 김목사님이 역시 스타리아로 태워다 주었다.
육촌여동생은 나에겐 영적인 딸과 같은 사람이었기에 이번 대전에 온 기회를 사용해서 만남을 갖게 된것은 매우 특별하고 기쁜만남이었다. 우리는 NC백화점 7층에 있는 애슐리퀸즈에서 저녁을 먹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청주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산업체 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하다가 대전에서 목회하는 목회자와 결혼하고 30여년간을 죽~ 대전서 살아온 동생은 나의 외육촌 여동생이다. 우리가 어릴때 동생집과 우리집은 이웃동네였다. 그래서 어릴때 자주 왕래하며 살았다.
곤색원피스를 단아하게 입은 동생이 애슐리퀀즈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시간 만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어제 만났다가 헤어져 다시 만난사람처럼 곧장 이야기꽃을 피워갔다.
동생과는 어릴때부터 교류하였지만 나는 선교사로 떠났고 동생은 대전에 살면서 카이스트에서 시작된 유학생 사역단체인 ‘쌤’에 소속해 중국유학생들을 전도하고 양육하는 귀한 사역을 하였다. 그후 수십년의 세월을 보낸후 다시 만난 우리는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정말 할말이 많았다.
동생이 말했다. “언니 제가 한남대에서 사역할때 여러나라에서 온 다양한 유학생들이 많았지만 특별히 중국유학생들을 섬기기로 한것은 언니때문이었어요. 언니가 중국으로 가셨잖아요. 그래서 영어권아이들도 있었지만(동생은영어교사이다) 중국인 학생들을 케어하게 된거예요.”
나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동생에게 복음을 듣고 사랑의 양육을 받았던 학생들은 본국에 돌아가서 교수가 된 학생들도 있다고 한다. 유학온 당시 동생으로부터 양육을 받았던 학생들은 지금도 만나면 동생에게 ‘엄마’라고 부른다고 한다. 복음안에서 동생이 얼마나 많은 사랑을 유학생들에게 퍼부었으면 선생님이 아니라 엄마라고 할까
이야기를 나누며 가끔씩 눈물이 핑도는 동생을 보면서 나는 아득한 옛날일이 떠올랐다. 결혼전 20대일때 친정에서 살때 내방에서 동생과 나란히 누워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는데 우리가 함께 덮었던 빨간꽃무늬가 있던 부드라운 질감의 실크이불이 생각났다.
그 수십년전에 어느날 저녁이 다 되었는데 동생이 우리집을 찾아왔다. 나는 저녁을 함께 먹고 어두워졌으니 내방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그밤에 역사가 일어나서 동생은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당시 대학2학년이었던 동생은 아버지가 소천하셔서 큰슬픔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를 유난히 좋아했던 동생은 커다란 상실감에 빠져서 마음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밤에 나는 동생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소개했다. 동생을 낳아준 육신의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동생을 창조하신 진짜 아버지는 하나님아버지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데는 조건이 있는데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 고 성경 요한복음 14:6절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동생이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아버지가 되어 주셔서 영원히 동생곁을 떠나가지 않으신다고 복음을 전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그날밤 동생은 주님을 만났고 다시 태어났다. 그후 동생은 내가 나가던 교회에 함께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있어서 산업체고등학교에 영어교사로 취직이 되어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주경야독하는 여공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양육을 했다.
그리고 결혼하고서는 대전에 살면서 한남대와 한밭대등에서 유학생들을 섬겨왔던 것이다. 동생이 말했다. “언니, 제가 영어교사를 계속했으면 지금쯤 매월 연금300만원은 받았을 거예요. 그러나 그랬으면 유학생 사역은 못했겠지요. 저는 교사를 그만두고 유학생 사역을 한것이 더 뿌듯하고 보람을 느껴요.” 동생은 복음의 가치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동생은 또 효녀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친정 어머니를 대전으로 오시게해서 자신의집 근처에 집을 얻어 놓고 어머니를 돌보아 드렸다. 동생의 지극한 섬김과 사랑을 받고 동생의 어머니는 행복하게 잘 사시다가 분명한 구원의 신앙을 갖고 89세에 천국입성을 하셨다.
동생과 나는 둘 다 집안에서 첫믿음을 가졌기에 고난과 어려움도 많았지만 부모님과 조부모님을 전도하여 예수 믿고 구원 받게하는 축복을 누렸다. 동생은 이제 행복한 중노년을 보내고 있다. 동생은 무남독녀 외동딸을 두었는데 그딸이 또 효녀이다. 얼마전에도 딸과 함께 일본여행을 다녀왔다고 한다.
나는 나대로 고난 가운데서 믿음을 지켜온 삶이 있었고 동생은 동생대로 그런 시간을 보냈지만 세월이 한참 지난후 만나서 나누는 주안에서 일어 났던 간증은 아름답기만했다. 나는 대구행 밤9:22분 KTX를 예매해 놓아서 천천히 식사하며 교제를 나누던 애슐리퀸즈에서 일어섰다.
동생은 “언니 대전에 오셨으니 성심당 빵은 꼭 드셔야해요.” 하면서 빵집으로 안내를 하였다. 양산이나 우산을 쓰고 길게 줄을 서서 사먹는다는 ‘성심당’에 가서 동생은 튀소(속엔팥이 들었고 겉은 소보로빵인 튀김소보로)빵을 두상자나 사 주었다. 한상자는 나에게, 한상자는 내 손주들인 로아 로이 조이 삼남매에게 가져다 주라면서 말이다.
KTX를 타고 서대구역에 내렸는데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올라가는데 바로 앞의 여성분이 성심당 빵을 세 개의 종이가방에 들고 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흠~ 성심당 빵이 유명한건 사실인가보네” 하는 생각을 하였다. 하긴 성심당이 전국 5대제과점 중의 하나라고 하니말이다.
큰사위가 나를 집까지 모셔다 드린다며 서대구역으로 마중을 나왔다. 사위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전 동생이 사준 빵을 전달해 줄 수 있어서 마침 잘 된 것이다. 아이들에게 아침으로 먹이라고 성심당 빵 한상자를 사위에게 건네 주었다.
교역자 수련회가 마침 대전에서 있었기에 동생을 만난것은 큰 보너스였다. 삶이 무엇이 그리 바쁜지 서로 안부는 주고 받고 지냈지만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20대에 복음을 전한 동생을 오랫만에 만나 복음의 결실을 내눈으로 확인한 이날은 정말 기분좋은 날이었다. 만남의 보너스가 더불로 주어진 기분 좋은 날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엡 4:11)
<저작권자 ⓒ 크리스천매거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송혜라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