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진 사회복지법인 “이웃과 함께” 대표이사
“나는 내 딸보다 하루만 더 살다 죽는 것이 소원이다” 이 말은 30이 넘은 발달장애인 딸을 둔 어머니의 절규다. 자신이 먼저 죽은 후 딸이 겪어야 될 끔찍한 일들을 예상하고 있음이다. 이 사회는 아직 장애인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나는 70년 가까이 장애인으로 살고 있지만 아직도 공동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하려면 1차 제지를 받고 2차에는 책임자쯤 되는 사람에게 나오지 말았으면 하는 말을 듣는다. 이유는 “자기네 수영장은 장애인이 사용하기에 부적합하여 자칫 위험에 빠지는 일이 있어서“라고 하지만 그건 장애인들을 받지 않기 위해 하는 상투적인 변명일 뿐 실제로는 혹시 전염병 환자는 아닐까? 또는 그곳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왜 장애인을 받았느냐고 항의가 들어올까 봐 겁을 내는 것이다.
서울 강서구에 장애인 학교를 지으려 할 때 구의원을 비롯한 주민들의 극심한 반대 앞에 제발 우리 아이들이 교육이라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며 무릎 꿇고 눈물로 애원하던 어머니들의 모습은 오랜 시간이 지나갔지만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다. 장애인학교도 못 짓게 하는 이 사회가 무슨 장애인들을 품을 수 있는 자세와 정서가 되어 있을까?
30여 년 전 대중목욕탕에 갔을 때 문 앞에서 거절 받은 기억이 있다. 그때 생각했다. 나는 이 사회에서 몸도 맘대로 씻을 수가 없구나.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우나나 대중목욕탕에 가면 주변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세월이 선생이라 한결 느긋해진 나는 그들의 눈총을 즐기며 살 정도가 됐다. 이십여 년 전 일본에 갔을 때 온천에 들른 적이 있다. 휠체어를 타고 내가 들어가자 직원인 듯한 이가 내게 달려왔다.
나는 속으로“아 여기서도 내쫓기는가?” 생각하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달려온 직원은 일본인 특유의 친절한 웃음과 몸짓으로 인사를 하며 뭐라고 말을 하는데 일본말이라 못 알아듣자 함께 간 일본 선교사님을 통해 들은 말은 “혹시 위험 하실 수도 있으니 자기가 옆에서 도와주어도 되겠느냐는 것이다” 아, 나는 정말 감동했다. 일본에 대한 정서적 감정이고 뭐 고를 떠나 한 인간에게 예의와 배려를 가지고 대하는 그를 보면서 몸의 때보다 켜켜이 쌓였던 마음의 때가 깡그리 씻겨 내리는 기분이었다.
가끔 대형 매장에 간다. 옷을 사기 위해서다. 이 옷 저 옷을 구경하고 있으면 점원이 이런저런 옷을 권하는데 내게 말하지 않고 함께 간 사람에게 하고 있다. 그러면 나는 슬그머니 그 가게를 나온다. 점원이 어디 가세요? 하고 묻기도 하는데 그러면 “내 옷 사러 왔는데 나한테 팔 의향이 없는 듯하니 그분한테 파세요.”라는 못된 말을 하고 다른 점포로 가기도 한다.
예전에 별것도 아닌 학생들 교복과 두발 자율화가 시작했을 때 많은 혼란이 있었다. 겨우 머리 좀 기르고 옷 하나 자유스럽게 입으라는 것이었는데... 그런가 하면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되자 그날로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들이 우리나라 여행객들에 의해 벌어졌다. 특히 우리보다 좀 못사는 나라에 가서 하는 행태들은 가히 목불인견이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건 사람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되어 있는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곳은 지은 지 30년도 넘은 아파트이다. 그래서 장애인 주차장이 따로 없다. 원래는 아파트 한 동에 하나씩 있었는데 장애인 운전자가 살지 않는 동에 있던 장애인 주차장을 없앤 것이다. 장애인 주차장이 꼭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 만들어 지기 전에 지은 것이기 때문에 꼭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관리사무소와 주민들의 생각이다. 내가 사는 동에는 장애인 주차장 하나를 그려줬다. 다행인지, 시혜인지, 구걸인지, 아니 배려라고 해야 하겠지.
그런데 주차장의 크기가 일반 자동차와 똑같다. 그러니 나는 차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상태에서는 휠체어를 타고 차에서 내릴 수도 탈 수도 없다. 다행인지 내가 사는 동 입구 바로 옆에 주차장이 있어서 주차를 하고 휠체어를 타는데 거기는 주민들이 다니는 통로라 약 30cm의 높이가 있다. 하여 뒤로 휠체어에 오르는 나는 볼썽사납게 엉덩이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겨우겨우 올라탄다.
젊었을 때는 비교적 쉬웠는데 나이가 들다보니 타고 내리려면 사지가 부들부들 떨린다. 게다가 지금은 좀 덜 하지만 주차장이 비어 있으면 아무나 와서 차를 댄다. 바닥에 장애인 주차장이라는 그림이 그려 있음에도 아랑곳없다. 그래서 장애인 표지판을 만들어서 세워놓았다. 그럼에도 주차표지판을 치우고 주차하는 몰상식한 인간도 있었다.
장애인 주차장은 장애인이 거기에 살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방문자 등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이런 정도의 배려가 없는 사회가 과연 장애인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보살피며 보호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것 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우리 사회가 장애인, 그것도 자기표현이 서툰 발달장애인들을 품안에 받아들일 준비가 굉장히 안 되어 있다.
우리 사회는 발달장애인이나 기타 장애인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안전망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는가?
- 우리는 정서적으로 그들을 받아들일 마음과 생각과 행동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가?
- 정부는 저들이 살아갈 수 있는 주택의 구조나 인력지원을 위한 예산을 빈틈없이 세워놓았는가?
- 만약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사회적 집단린치(학대)에 대하여 대비되어 있는가?
- 저들의 정규교육과 사회생활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교육정책은 충분한가?
- 의료, 보육, 경제, 정보, 이동, 일자리에 대한 준비는 가용이 가능한가?
준비부터 하자. 무조건 탈 시설을 주장할 일이 아니라 위와 같은 준비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중증장애인들에게는 탈 시설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차에서 힘들게 내리는데 어떤 인간이 와서 말을 한다. 주차를 안 할 때는 내가 없다는 표시를 해달란다. 앞 동의 어떤 사람이 주차를 못해서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다면서... 내가 물었다. “본인은 집을 나갈 때 나 집에 없음”하고 대문에 붙이고 다니느냐고. 앞 동에 사는 사람인지 방문하러 온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은 그 동에서 해결해야 될 문제이다. 세상에는 별 미친 인간도 많다.
조선시대 양반 상놈 신분제도가 없어지자 상놈이었던 사람들이 나와서 할 것이 없었다. 예전에는 누구의 명령만 수행하면 됐지만 이제는 자기 스스로 무엇이든 해야 하니까 할 수 있는 일도 엄두도 나지 않아서 다시 양반집으로 기어 들어가서 밥만 먹여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상놈 신분이었던 사람들은 자구책을 찾아 나섰고 살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서 차츰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한편 양반집 사람들은 부릴 사람이 없으니 자기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의식주 문제가 곤혹스러웠고 이런저런 일로 땅도 돈도 없어져 버린 양반집 규수요 아낙네들은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여 비참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렇듯 준비 없이 닥쳐오는 일들은 인간에게 엄청난 시련과 비극적 삶에 봉착하게 한다.
몇 년 전 염전 노예로 수십 년간 한 푼 돈도 받지 못하고 살았던 장애인이나, 농장에서 노예처럼 부림 받았던 장애인을 기억하라. 그들은 사람으로서는 받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짐승처럼 땅바닥에서 밥을 먹었으며 동물의 우리 같은 곳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아파도 병원은 가본 적도 없고 약도 제대로 사주지 않았다고 한다.
장애인들을 종처럼 부린 사람들의 한결같은 변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었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또한, 짐승만도 못한 한마을 남자들 여럿이서 지적발달장애인 여성을 수년간에 걸쳐 성폭행했던 사건은 기억만 해도 치가 떨린다. 더 경악할 일은, 그 마을 여자들이 한결같이 “병신 같은 년이 꼬리를 쳐서 자기들 남편, 아들, 아버지 등이 그랬던 것”이라며 오히려 그 피해 여성을 마을에서 쫓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장애인을 보호하기 위한 이 사회 구조는 얼마나 안전하며 사람들의 인식은 또 얼마나 잘 무장되었는가? 이 일련의 사건들만 보아도 우리나라의 일반인들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인식 수준은 매우 위태로운 지경이며 사회적 안전망 또한 믿을 수 없는 수준임을 보여주고 있다. 탈 시설을 외치기 전에 준비부터 하자.
나는 70년 가까이 장애인으로 살고 있지만 아직도 공동수영장에 가서 수영을 하려면 1차 제지를 받고 2차에는 책임자쯤 되는 사람에게 나오지 말았으면 하는 말을 듣는다. 이유는 “자기네 수영장은 장애인이 사용하기에 부적합하여 자칫 위험에 빠지는 일이 있어서“라고 하지만 그건 장애인들을 받지 않기 위해 하는 상투적인 변명일 뿐 실제로는 혹시 전염병 환자는 아닐까? 또는 그곳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왜 장애인을 받았느냐고 항의가 들어올까 봐 겁을 내는 것이다.
서울 강서구에 장애인 학교를 지으려 할 때 구의원을 비롯한 주민들의 극심한 반대 앞에 제발 우리 아이들이 교육이라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며 무릎 꿇고 눈물로 애원하던 어머니들의 모습은 오랜 시간이 지나갔지만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다. 장애인학교도 못 짓게 하는 이 사회가 무슨 장애인들을 품을 수 있는 자세와 정서가 되어 있을까?
30여 년 전 대중목욕탕에 갔을 때 문 앞에서 거절 받은 기억이 있다. 그때 생각했다. 나는 이 사회에서 몸도 맘대로 씻을 수가 없구나.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우나나 대중목욕탕에 가면 주변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세월이 선생이라 한결 느긋해진 나는 그들의 눈총을 즐기며 살 정도가 됐다. 이십여 년 전 일본에 갔을 때 온천에 들른 적이 있다. 휠체어를 타고 내가 들어가자 직원인 듯한 이가 내게 달려왔다.
나는 속으로“아 여기서도 내쫓기는가?” 생각하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달려온 직원은 일본인 특유의 친절한 웃음과 몸짓으로 인사를 하며 뭐라고 말을 하는데 일본말이라 못 알아듣자 함께 간 일본 선교사님을 통해 들은 말은 “혹시 위험 하실 수도 있으니 자기가 옆에서 도와주어도 되겠느냐는 것이다” 아, 나는 정말 감동했다. 일본에 대한 정서적 감정이고 뭐 고를 떠나 한 인간에게 예의와 배려를 가지고 대하는 그를 보면서 몸의 때보다 켜켜이 쌓였던 마음의 때가 깡그리 씻겨 내리는 기분이었다.
가끔 대형 매장에 간다. 옷을 사기 위해서다. 이 옷 저 옷을 구경하고 있으면 점원이 이런저런 옷을 권하는데 내게 말하지 않고 함께 간 사람에게 하고 있다. 그러면 나는 슬그머니 그 가게를 나온다. 점원이 어디 가세요? 하고 묻기도 하는데 그러면 “내 옷 사러 왔는데 나한테 팔 의향이 없는 듯하니 그분한테 파세요.”라는 못된 말을 하고 다른 점포로 가기도 한다.
예전에 별것도 아닌 학생들 교복과 두발 자율화가 시작했을 때 많은 혼란이 있었다. 겨우 머리 좀 기르고 옷 하나 자유스럽게 입으라는 것이었는데... 그런가 하면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되자 그날로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키는 사건들이 우리나라 여행객들에 의해 벌어졌다. 특히 우리보다 좀 못사는 나라에 가서 하는 행태들은 가히 목불인견이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건 사람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되어 있는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곳은 지은 지 30년도 넘은 아파트이다. 그래서 장애인 주차장이 따로 없다. 원래는 아파트 한 동에 하나씩 있었는데 장애인 운전자가 살지 않는 동에 있던 장애인 주차장을 없앤 것이다. 장애인 주차장이 꼭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 만들어 지기 전에 지은 것이기 때문에 꼭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관리사무소와 주민들의 생각이다. 내가 사는 동에는 장애인 주차장 하나를 그려줬다. 다행인지, 시혜인지, 구걸인지, 아니 배려라고 해야 하겠지.
그런데 주차장의 크기가 일반 자동차와 똑같다. 그러니 나는 차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상태에서는 휠체어를 타고 차에서 내릴 수도 탈 수도 없다. 다행인지 내가 사는 동 입구 바로 옆에 주차장이 있어서 주차를 하고 휠체어를 타는데 거기는 주민들이 다니는 통로라 약 30cm의 높이가 있다. 하여 뒤로 휠체어에 오르는 나는 볼썽사납게 엉덩이를 하늘 높이 치켜들고 겨우겨우 올라탄다.
젊었을 때는 비교적 쉬웠는데 나이가 들다보니 타고 내리려면 사지가 부들부들 떨린다. 게다가 지금은 좀 덜 하지만 주차장이 비어 있으면 아무나 와서 차를 댄다. 바닥에 장애인 주차장이라는 그림이 그려 있음에도 아랑곳없다. 그래서 장애인 표지판을 만들어서 세워놓았다. 그럼에도 주차표지판을 치우고 주차하는 몰상식한 인간도 있었다.
장애인 주차장은 장애인이 거기에 살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방문자 등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이런 정도의 배려가 없는 사회가 과연 장애인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보살피며 보호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것 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우리 사회가 장애인, 그것도 자기표현이 서툰 발달장애인들을 품안에 받아들일 준비가 굉장히 안 되어 있다.
우리 사회는 발달장애인이나 기타 장애인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안전망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는가?
- 우리는 정서적으로 그들을 받아들일 마음과 생각과 행동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가?
- 정부는 저들이 살아갈 수 있는 주택의 구조나 인력지원을 위한 예산을 빈틈없이 세워놓았는가?
- 만약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사회적 집단린치(학대)에 대하여 대비되어 있는가?
- 저들의 정규교육과 사회생활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교육정책은 충분한가?
- 의료, 보육, 경제, 정보, 이동, 일자리에 대한 준비는 가용이 가능한가?
준비부터 하자. 무조건 탈 시설을 주장할 일이 아니라 위와 같은 준비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중증장애인들에게는 탈 시설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차에서 힘들게 내리는데 어떤 인간이 와서 말을 한다. 주차를 안 할 때는 내가 없다는 표시를 해달란다. 앞 동의 어떤 사람이 주차를 못해서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다면서... 내가 물었다. “본인은 집을 나갈 때 나 집에 없음”하고 대문에 붙이고 다니느냐고. 앞 동에 사는 사람인지 방문하러 온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은 그 동에서 해결해야 될 문제이다. 세상에는 별 미친 인간도 많다.
조선시대 양반 상놈 신분제도가 없어지자 상놈이었던 사람들이 나와서 할 것이 없었다. 예전에는 누구의 명령만 수행하면 됐지만 이제는 자기 스스로 무엇이든 해야 하니까 할 수 있는 일도 엄두도 나지 않아서 다시 양반집으로 기어 들어가서 밥만 먹여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상놈 신분이었던 사람들은 자구책을 찾아 나섰고 살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서 차츰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한편 양반집 사람들은 부릴 사람이 없으니 자기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의식주 문제가 곤혹스러웠고 이런저런 일로 땅도 돈도 없어져 버린 양반집 규수요 아낙네들은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여 비참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이렇듯 준비 없이 닥쳐오는 일들은 인간에게 엄청난 시련과 비극적 삶에 봉착하게 한다.
몇 년 전 염전 노예로 수십 년간 한 푼 돈도 받지 못하고 살았던 장애인이나, 농장에서 노예처럼 부림 받았던 장애인을 기억하라. 그들은 사람으로서는 받지 말아야 할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짐승처럼 땅바닥에서 밥을 먹었으며 동물의 우리 같은 곳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아파도 병원은 가본 적도 없고 약도 제대로 사주지 않았다고 한다.
장애인들을 종처럼 부린 사람들의 한결같은 변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었다고 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또한, 짐승만도 못한 한마을 남자들 여럿이서 지적발달장애인 여성을 수년간에 걸쳐 성폭행했던 사건은 기억만 해도 치가 떨린다. 더 경악할 일은, 그 마을 여자들이 한결같이 “병신 같은 년이 꼬리를 쳐서 자기들 남편, 아들, 아버지 등이 그랬던 것”이라며 오히려 그 피해 여성을 마을에서 쫓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장애인을 보호하기 위한 이 사회 구조는 얼마나 안전하며 사람들의 인식은 또 얼마나 잘 무장되었는가? 이 일련의 사건들만 보아도 우리나라의 일반인들이 장애인을 바라보는 인식 수준은 매우 위태로운 지경이며 사회적 안전망 또한 믿을 수 없는 수준임을 보여주고 있다. 탈 시설을 외치기 전에 준비부터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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