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거지에서 톱가수 그리고 목사가 되기까지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
아버지, 윤부길
봄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얼음이 녹으면 대지는 깨어나고 하늘의 색마저 달라진다.
그리고 모든 생명이 다시 태어난다.
그 놀라운 변화 가운데 얼마나 많은 신비와 경이로움이 숨어 있던가.
무심한 이들의 눈에는 그 모든 것들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같아 보이지만, 세상에 그런 생명은 없다.
목숨 있는 모든 것은 손때를 탈 만큼 보듬어 주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달콤한 젖내와 왠지 모를 포근함이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내 인생에도 짧았지만 그런 봄과 같은 시절이 있었다.
호적에는 1943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나는 1942년생이다.
그때만 해도 호적에 실제 나이와 생일이 다르게 올라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내가 태어난 1942년은 유난히 더웠다.
당시 대구의 기온이 40도까지 올랐다고 하니 만삭의 어머니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여름 내내 부른 배를 안고 고생하신 어머니는 음력 7월에야 몸을 푸셨다.
오후에 시작된 산통이 저녁까지 계속되자, 아버지는 건넌방에서 가슴 졸이며 기다리셨다.
이윽고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출산을 거들던 친척 아주머니께서 나오셨다.
“아이고, 축하하네. 아들일세.”
그 한마디에 아버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엄마와 아빠의 이목구비를 예쁘게 닮은 건강한 사내아이였다.
아버지는 귀한 아들을 얻은 기념으로 친구들을 불러모아 동네가 떠들썩하도록 잔치가 벌어졌다.
그 자리에는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의 내로라하는 예술가들 뿐만 아니라 일본 연예인까지 몰려왔다.
한참 태평양 전쟁이 치러지던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내가 태어난 그날 만큼은 서로 어울려 축하하고
축하를 받으며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참으로 많은 축복을 받으며 세상에 태어난 행복한 아기였다.
내가 이처럼 특별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현재 서울대 음대의 전신인 경성음악전문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성악과 작곡을 전공하고
일본 유학을 한 엘리트였을 뿐 아니라 연극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직접 대본을 쓰는 것은 물론,
무대와 의상을 디자인하고 연기까지 하는 만능 엔터네이너였다.
오페레타부터 악극 운동까지 주도했던 예술계의 선구자, 한국 현대 예술사에 한 획을 그은 천재 예술가, 윤부길이 바로 우리 아버지였다!
그 시절, 아버지는 스타였지만 바쁜 중에도 젖먹이인 나를 꼭 데리고 다니셨다고 한다.
지금도 아버지가 차를 타고 ‘나, 윤부길이야’ 한마디만 하면 시골버스나 기차에서 서로 모시려고
하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런 아버지가 어린 내 눈에는 얼마나 대단해 보였는지 모른다.
멋진 차림의 당당한 아버지와 곱게 단장한 젊은 어머니, 그 품에 안겨 잠든 아기,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은 내 인생의 봄날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 끔같은 풍경이다.
아버지를 보면서 나도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어버지는 노래는커녕 극장에 얼씬도 못하게 하셨다.
암울한 시대, 신산한 예술가의 삶을 아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으셨던 걸까.
심지어 아버지는 내가 친구들과 구슬치기나 딱지치기 놀이를 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셨다.
“너는 공부를 해야한다.”
아버지는 내가 공부하기를 바라셨다.
나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을 늘 안타까워하신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내게 “공부하라.” 고 당부하셨다. 돌이켜보면 아들인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막연하게 당신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자식인 나에게 주신 것이 거의 없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나의 어린 시절은 온통 결핍과 가난, 그리고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윤부길의 아들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예술가로서의 ‘끼’ 였다. 그 덕에 나는 가수도 되고 작곡도 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유지나 다름없는 공부를 일찌감치 접고 가수의 길로 들어선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그러나 노래를 부르며 예인의 삶을 사는 내내 내게 공부하기를 당부하셨던 아버지의 말씀은 마치
유언처럼 남아 내 마음을 늘 무겁게 했다.
그 짐을 벗은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0여 년이 지난 뒤,
음악목사의 길을 가면서부터 였다.
어머니, 성경자
“하나님! 우리 항기와 복희를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청계천 거지촌에 세워진 천막교회,
날마다 그곳 가마니 바닥에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시던 어머니,
곱던 물색은 간데없이 메마른 어깨를 들썩이며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어린 자식들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시던 어머니, 지금도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성경자’라는 본명보다 ‘고향선’이라는 예명으로 더 유명한 악극계의 스타셨다.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무대에서 춤사위를 펼치던 모습은
어린 내 눈에도 천상의 선녀 같았다.
천재무용가 최승희의 제자였던 어머니는 일본 유학시절 아버지를 만나
‘라미라 가극단’에서 함께 활동하셨다.
당시 악극단은 최고의 예술가들이 모인 곳으로 그중에서도
‘라미라 가극단’은 우리말과 글을 쓰지 못하던 때, ‘아리랑’의 음계인 ‘라미라’를
극단 이름으로 삼을 만큼 민족정서가 강한 곳이었다.
이처럼 재주 있는 신여성이었지만, 어머니는 우리와 아버지에게 더할 나위 없이 헌신적이셨다.
“그 뛰어난 재능을 이렇게 썩히고 있다니, 아깝지 않습니까?
아이 낳고 살림하려고 일본 유학까지 하셨습니까?”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머니는 나를 더 꼭 안아주곤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런 어머니에게 모질게 하셨다.
아버지는 사소한 일로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아 어머니를 괴롭히더니
급기야는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기까지 하셨다.
어느 날 어머니를 따라 시내 미장원에 갔다.
어머니께서 잠시 머리를 하는 동안 2층 난간에 매달려 놀고 있던
내가 그만 창밖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차 하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항...항기야!”
“......”
2부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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