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는 안 받아요!

박창진 사회복지법인 “이웃과 함께” 대표이사

▲박창진목사 / 사회복지학 박사, 사회복지법인 “이웃과 함께” 대표이사, 꿈이 있는 마을 원장

설날을 맞아 아들과 딸들 며느리 손자 손녀 등 평소에 모이기 힘들었던 자녀들이 이틀 동안 와서 북적거리고 갔다. 연휴 4일째 아이들도 모두 각자 집으로 돌아가고 출가 안 한 아이들과 함께 남았다. 음식이고 뭐고 다들 해줘서 편하게 지낸 듯해도 아내가 뒤 치닥거리에 지친 것 같아 나가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평소 아내가 먹고 싶어 하던 아구찜을 먹으러 나갔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평소에 봐뒀던 아구 전문 식당이 있었고 어제 지나면서 보니 문이 열려있어 거기로 갔다. 헌대, 주차장이 없어서 전화로 물어보니 식당 바로 옆 교회에 주차하면 된다고 하여 교회 주차장으로 들어가니 마침 주일이라 차들이 꽉 들어차 있어서 주차할 곳이 없었다.

시간을 보니 예배를 마칠 때쯤이라 끝나면 차들이 빠질 것 같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가만히 교회를 보니 30여 년 전 내가 두 번 정도 집회를 했던 곳이다. 그때는 언덕 위에 작은 예배당이었는데 지금은 도로변으로 내려와 크고 아름답게 지어져 있었다. “식당 주인이 여기다가 주차해도 된다고 하는 걸 보니 아마도 이 교회 교인인가 보다.”라는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30여 분이 지나 차들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저기 주차할 곳을 살펴보다가 남들에게 방해되지 않을 곳에 주차를 하고 고픈 배를 참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높은 계단이 하나 있어서 아들이 힘들게 휠체어를 도와 들어가니 안에 또 하나의 계단이 있고 그 위가 식당이었다. 하여 올라가려고 앞바퀴를 올려놓고는 이대로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종업원인 듯한 분이 웃으며 들어오라고 하는데 갑자기 안쪽에 있던 주인인 듯한 여자가 그 종업원에게 무언가 말을 했고 그 말소리는 작지 않아서 나와 내 가족뿐만 아니라 식사를 하고 있던 몇몇 사람들의 귀에까지 모두에게 들렸다.

"휠체어는 안 받아" 순간 나는 잘못 들었나 싶었고 옆에 있던 아내는 내 눈치를 보며 당황해 하였다. 그러자 종업원이 우리에게 와서 매우 민망한 표정으로 “휠체어는 안 받는다고 하네요.” 한다. 순간, 하하하~ 아내가 큰소리로 웃었다. 평소에도 잘 웃는 편이지만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자 필요이상 크게 웃었던 것이다. 결혼 초기에 내가 휠체어를 타고 넘어지자 깔깔 웃었다. 두 눈에는 물기를 담고서, 그런데 이번에는 물기 대신 노여움이 가득했다.

나는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글프기도 분노가 치솟기도 했다. 하지만 조용히 “휠체어 손님은 안 받는다고요?”라고 한 번 더 확인을 하고 나왔다. 70년 가까이 살면서 처음 듣는 말에 매우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아들은 놀라운 말에 분노에 차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만일 내가 부정적인 말이나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부글거리는 그 녀석의 가슴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이겠기에 터지려는 가슴을 꾹꾹 눌러 참으며 나왔다.

그 주인 여자에게 휠체어를 탄 나는 사람이 아니 였고 그냥 무생물인 낡은 휠체어에 불과했다. 휠체어가 인격이요 휠체어가 생명체요 휠체어가 장사 수단의 걸림돌이냐 아니냐의 판단 대상일 뿐이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런 경우 어찌했을까? 아마도 얼른 달려 나와 함께 도와주며 휠체어가 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협력하거나, 조금 더 생각이 깊은 사장이라면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던지, 아니면 “편의시설이 안되어 있어서 미안하다”면서 “곧 만들어 놓겠다.”라고 했을 것이다. 이십 년쯤 전에 근무하던 복지관 근처에 중국집에 갔다가 화장실에 갔는데 벽걸이용 소변기만 두 개가 있었다.

벽걸이용이란 소변기가 바닥까지 긴 것이 아니라 반쯤 잘려서 허공에 달려 있는 것을 일컫는데 휠체어를 탄 사람들은 소변보기가 매우 힘들다. 젊은 시절에는 않아서 쏘면 되지만 나이 먹었거나 척수장애인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여 중국집 사장님에게 불편함을 얘기하고 왔는데 다음날 그 사장님이 오늘 자기가 자장면을 대접할테니 와달라고 전화가 와서 가보니 화장실에 소변기가 긴 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그날 이후 오늘까지 단골이 되었다. 이렇게 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휠체어는 안 받아요“는 정말 아니지 않나?

”이름의 힘”이란 책에는 긍정적인 이름을 불렀을 때 듣는 사람의 뇌와 심장에 좋은 영양을 미치는 파장이 일어나고, 부정적인 호칭일 때는 그와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것은 호칭에 따라 자신의 내부 어디에선가 신체밸런스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삶의 방향성과 인생의 결과도 판이하게 달라진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에게 긍정적인 호칭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꽃 일부) 이렇게 누가 나를 뭐라고 불러 주느냐에 따라 나의 존재. 그의 존재가 달라지는 것이다.

차로 돌아오며 아무 말도 없는 아들은 속으로 울분을 참는 듯이 보였다. 비슷한 마음으로 있을 아내를 걱정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거기서 이런저런 말을 한들 아직도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기도 하고, 저런 사람이 교회에 다닙네 하고 교패를 붙여놓고 있다는 것이 심히 걱정되기도 하였다. 또 나를 위로하려고 아들의 했던 말처럼 식당주인이 휠체어를 탄 진상 손님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였지만 그건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 아닌가. 씁쓸한 감정을 억누르며 식당을 찾아봤지만 웬일인지 그 많던 식당은 보이지 않고 홍해와 같은 삶의 절벽만 눈에 보였다.

40년쯤 전에 친구와 둘이 부산 여행을 갔다. 택시를 타려고 하는데 아무도 세워주지 않았다. 급기야 정차하고 있는 택시마저 우리가 다가가면 쏜살같이 줄행랑을 치는 것이 아닌가? 친구와 나는 “도대체 왜 그러지? 우린 술도 안 먹었는데...” 생전에 처음으로 간 부산 여행이 씁쓸함으로 마무리 되어갈 무렵 저녁을 먹으러 들어간 식당 주인아저씨가 우리의 의문을 풀어줬다.

6.25 전쟁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부산으로 피난을 왔는데 그중에 상이군인들이 식당이나 술집에서 음식 등을 먹고는 “내가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가 장애인이 됐는데 무슨 돈을 달라느냐.”며 절단된 손 대신에 끼운 갈고리 모양의 의수 등으로 식탁을 내리 꽂거나, 목발을 마구 휘둘러 대는 통에 신고 받고 온 경찰들도 식당 주인에게 이해하라며 그냥 보내곤 해서 부산 사람들에게 장애인은 매우 인식이 안 좋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이해가 되었고, 그 후 80년 대 쯤에 갔을 때는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며 장애인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았다.

결국 주차와 식당을 해결할 수 있는 대형 쇼핑몰에 갔다. 연휴를 맞아 건물 안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고 1층으로 3층으로 식당 찾아 삼만 리 찾아갔지만 가는 곳마다 30분 기다림은 기본이었다. 어느새 시간은 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서너 달쯤 전에 당뇨 판정을 받았다. 갑자기 머리가 핑 돌며 현기증이 낫다. 말로만 듣던 저혈당이 온 것이다. 깨닫는 순간 당뇨 판정을 받던 날 아내가 만일을 모르니 가지고 다니라며 사탕 몇 개를 가방에 넣어줬던 기억이 나서 급히 사탕을 까서 입에 물었더니 조금 후 약간 나아졌다. 처음에는 맛있는 집을 찾아 다녔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기다림이 제일 짧은 집을 찾았다.

어쩐 일인지 요즘은 먹고 돌아서면 배가 허전하였다. 아마도 당뇨환자의 특성이리라, 또 아무거나 먹을 수 없어서 음식도 가려먹다 보니 명절 뒤끝의 음식 스트레스가 없지 않다. 맛있게 밥을 먹는 사람들이 부러울 수가 없었다. 행복하게 식사하는 모습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내가 꼭 사흘 굶은 거지꼴이란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30여 년째 당뇨병을 앓고 있는 후배가 저혈당이 와서 전혀 모르는 어린아이가 먹고 있던 초코파이를 자기도 모르게 뺏어 먹고 그 가족들에게 백배사죄하며 정말 비참하고 서글펏다. 라는 말이 떠올랐다.

여하튼 겨우 찾아 들어간 곳이 칼국수 집, 다른 가족들은 이런저런 메뉴를, 나는 그중에 내게 좋을 것 같은 비빔 보리밥을 시켰다. 그런데 아. 순 깡보리, 보리만으로 지은 밥인데 아내가 꼭꼭 씹어야 한다고 몇 번 이나 당부를 하였다. 그런데 뭐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감사하며 먹었다. 하지만 소화력이 떨어져서 인지 사흘 동안 설사를 하여 정말 힘들었다. 그럴 때 마다 그 아구 집 생각이 났고 그 사장 여자가 더욱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당뇨 합병증으로 13년간 혈액투석을 하시며 고생하고 돌아가신 가족력이 있는 나로서는 당뇨는 매우 위협적인 존재인데 판정 받은지 얼마 안되어 그런지 섭식 등 적응이 쉽지 않고, 혈당조절이 잘 안돼서 이런저런 고생을 하고 있다.


내 말을 들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다채롭다. A-듣자마자 흥분하여 거기가 어딘 인지 당장 가서 혼을 내야 한다고 하면서 그 식당 앞에 가서 피켓 들고 시위라도 하겠단다. B-그냥 놔두면 안 돼요, 다른 사람들도 피해를 보니까요 시청에 신고해서 다시는 그러지 못하게 합시다. C-다시 한번 가시지요, 그래서 별말 없이 손님으로 받으면 그냥 놓아두고, 전과 같으면 녹음하고 촬영해서 국가인권위원회와 각 기관에 신고를 해서 혼을 내야 합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은 2007년 제정되었고 2008년 4월부터 시행되었다. 하지만 좋은 법이 많은들 무엇 하랴 지켜지지 않으면 별무소용인 것을, 이런 사회적인 편견과 차별이 근절되지 않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 시대에 왈가왈부 하고 있는 탈시설 논의는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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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라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