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선교문학 선교회 대표 나은혜 목사
어머니의 머리가 또 많이 길어졌다. 나이가 들면 여성들도 머리가 빠져서 머리속이 훤하게 들여다 보이는 사람이 많은데 우리 어머니는 90세 나이가 무색하게 머리숱이 아주 많다 그리고 머리도 잘 자란다.
그래서 평균 두달에 한번은 파마를 해 드려야 한다. 이번에도 어머니의 머리는 빨리 길어나서 주무시고 나서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사자의 갈기털처럼 어머니의 머리가 하늘로 치솟아 있곤 했다.
지난번 어머니를 모시고 미용비를 아끼기 위해서 내가 사는 동네에서 파마를 하지 못하고 예전에 살던 동네까지 가서 미용비를 저렴하게 받는 집사님에게 파마를 하고 왔다는 글을 쓴적이 있다.
후에 그 글을 읽은 오랜 지인 여목사님 한분이 메세지를 보내왔다. “저... 얼마 안되지만 어머니의 파마비를 제가 좀 보내 드릴께요.” 그리고서 5만원을 계좌이체를 통해 보내왔다.
그후 우연히 그 지인 목사님과 통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지난번 목사님이 보내 주신 파마비로 어머니 파마를 해 드리러 또 가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여목사님은 나에게 자신도 교회서 경로대학을 맡고 있는데 나이가 드신 어르신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머리띠를 해 드려도 보기 좋다면서 머리에 바를 헤어크림을 좀 보내 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택배가 도착했다. 헤어크림 두병과 수건, 참외,복숭아,호박,무우등 여러가지를 넣어서 보내왔다. 헤어크림만 달랑 보내기가 그래서 자기집 냉장고를 뒤져서 다 싸보냈다는 것이다.
고마웠다. 여목사님의 나를 생각해 주는 그 고운 마음이 마음에 감동을 주었다. 그 목사님은 내가 선교지 있을때부터 우리를 후원하던 후원교회의 부목사로서 선교사들을 돌보아 주던 분이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선교지에서 돌아왔지만 그 여목사님은 여전히 나를 선교적 차원에서 생각하고 돕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머리숱이 너무 많아서 그냥 커트해서 헤어로션을 바르는 정도로는 감당이 안된다.
그래서 지난 토요일 시간을 내어서 어머니를 자동차에 모시고 어머니의 머리를 늘 파마해 주는 예의 그 신월동에 있는 미장원으로 갔다. 순복음 교회 집사님인 미장원 원장님은 익숙한 솜씨로 어머니의 머리를 말았다.
시간이 지나서 파마를 풀고 감은후 보니 어머니의 머리는 한송이 커다란 꽃송이 처럼 예쁘게 파마가 되어 있었다. 또 한참동안 예쁜 파마 머리를 하고 있을 어머니를 생각하며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어머니는 내가 머리 파마를 하러 가자고 할때는 안간다고 떼를 쓰면서 침대에 누워 버리곤 고집을 부렸었다. 미장원에 모시고 오느라 한참 어머니와 실갱이를 하였다. 겨우 겨우 달래서 모시고 미장원에 왔는데 막상 머리가 예쁘게 파마된 모습을 보고는 어머니는 아주 기분좋아 하신다.
미장원 집사님은 내 머리도 짧게 자르고 드라이를 해 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미장원 원장 집사님은 “어머니 파마비만 받을께요 목사님 머리는 그냥 해 드리고요 “한다.
전에도 말했지만 집사님은 내가 선교사인 것을 알고난 후 수년동안 돈을 받지 않고 내 머리를 잘라주고 드라이를 해 주었다. 집사님의 마음속에 선교사를 돕는 마음이 깊숙히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시대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도들이 선교에 관련하여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너도 선교사로 가든지 선교사를 보내든지(돕든지)하라.”는 말일 것이다. 작은일인것 같으나 선교사의 머리를 무료로 해 주는 마음엔 그런 아름다운 선교정신이 숨어 있는 것이다.
어머니를 자동차에 태우고 16킬로를 달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파마를 해서 단정해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남편 K선교사도 즐거워 한다. “야~ 어머니 훨씬 젊어 지셨어요.”
나는 그런 모자를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 이렇게 어머니를 파마도 해 드리고 모시고 사는 일이 얼마나 남았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문득 비자제한을 받아 한국에 돌아와서 뒤늦게 장신대 신대원에 입학해서 M.div 과정을 밟고 있을때가 떠 올랐다. 나는 당시 장신대 기숙사에 살았는데 매주말에 청주에 내려 갔다.
친정 아버지가 홀로 살고 있으셔서 돌봐 드리러 갔던 것이다. 선교지에 있는 동안은 부모님에 대한 걱정만 했지 돌봐 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에 나와 있는동안 기회가 주어졌을때 양가의 부모님을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하겠다고 나는 단단히 결심하곤 하였다.
나는 매주 누가 무료로 준 세피아2 자동차를 운전해서 청주에 사시는 아버지를 돌보아 드리러 갔었다. 아버지 집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엉망이 되어 있는 집안을 치우고 빨래를 하고 음식을 만들어 두고 “아버지 다음주에 또 올께요” 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4남1녀중 외동딸인 내가 매주 아버지를 보러 오는것을 무척 기뻐 하셨다. 주말에 와서 1박2일의 짧은 시간을 보내고 가도 다음주에 또 오겠다는 내 말에 희망을 걸고 활짝 웃으시며 충청도 사투리로”그랴~ 알았어. 어서가” 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후에 텃밭에서 고구마를 캐다가 넘어져 발목을 다치셔서 걷지 못하게 되자 등급을 신청하고 요양보호사를 매일 오게해서 돌보아 드렸다. 그래도 나는 매주 내려갔다. 가족이 관심을 가져야 요양 보호사도 아버지에게 더 잘하리란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 신문을 보시고 책을 읽을만큼 건강하시던 아버지는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인생의시간표에 소천을 하셨다. 당시 79세로 우리 형제들은 건강하신 아버지가 적어도 10년은 너끈히 사실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는데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보내 드리며 울고 울고 또 울었다. 이상하게도 그동안 내가 아버지에게 잘했던 것보다 못했던 한가지 일이 생각나서 가슴을 치며 울었다. 그동안 아버지가 나에게 잘해준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는 이처럼 나와 사랑과 천륜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게 친정 아버지가 돌아 가신후 한분 남은 시어머님을 모시고 살고 있는 지금 나는 참 조심스럽다. 언젠가 어머니도 나와 남편곁을 떠나 가실텐데... 그때 후회스럽지 않도록 잘 모셔야 겠다는 생각을 많이한다.
종종 남편 K선교사는 어린애처럼 행동하는 어머니에게 화를 낸다. 그러면 나는 마치 누나처럼 점잖게 타이른다. “여보 그러지 말아요. 나중에 어머니 돌아 가시면 화내고 불친절하게 했던것 후회해요.”
늘 넉넉지 못해서 어머니에게 그리 잘해 드리는것도 없지만, 우리 부부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하루 하루를 조심 스럽게 살아간다. 갈수록 치매가 심해지면서 점점 어린애처럼 되어 버리는 어머니 자식과의 관계도 잊어 버리는 어머니를 뵈면서 나는 참으로 인생무상을 느낀다.
며칠전에도 어머니를 주간보호센터에 배웅하기 위해 지하주차장에서 어머니와 함께 자동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곧 차가 올거란 생각을 하면서 나는 미리 이별을 준비했다. 어머니를 꼭 안아 드리면서 “어머니 잘 다녀오세요.” 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어머니에게 “저... 제가 누구예요?” 했다. 어머니는 나를 물끄럼히 바라보다가 부끄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선생님이지 선생님...”이라고 대답 하신다. 아...어머니의 인생시간표가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중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시 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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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라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