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계의 ‘기부 천사’ 김장훈 씨를 본지가 만났습니다.
Q. 안녕하세요.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시는 것 같은데요. 요즈음 근황은 어떠신가요?
A. 안녕하십니까. 가수 김장훈입니다. 반갑습니다.
제가 영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데, 정말 반갑고요. 영광입니다.
1년 6개월 정도 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어요. 무대 위의 사건과 여러 가지 일로 인해서 그렇게 되었지만, 저는 전혀 실망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장훈아! 너 그동안 한쪽 날개가 부러진 채로 앞만 보고 달렸는데, 억지로 날려고 하지 말고 좀 쉼을 가져라.’ 그러신 건가? 라는 생각도 하면서 얻어야 할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지내왔어요. 1년 6개월 후 다시 복귀해서 김장훈 100회 고운 말 콘서트를 하고 있어요. 그동안 무미건조한 삶 이었어요 요즈음 이렇게 행복할 수 있구나. 새삼 실감하고 있습니다. 내년 5월 4일까지 100회 공연을 마무리하고요. 앞으로 다툼을 좀 줄이고요. 하하(웃음) 앞으로 봉사, 독도지킴이, 나누는 일에 선택과 집중을 하려고 합니다.
Q. 김장훈 100회 고운 말 콘서트 의미 있게 와 닿았어요. 고운 말 콘서트를 어떤 계기로 공연하게 되셨나요?
A. 크리스천으로써 부끄러운 이야기지만요. 저는 신앙이야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자신의 신앙의 자유가 있으니까요. 제가 어려운 세상 욕이라도 하고 살아야지 이런 생각을 가지고 격한 언어나, 장난스러운 행동이나 격한 행동을 많이 하는 편이었어요. 사실 무대에서도 격한 언어를 사용해서 좋지 않은 일이 있었고, 그 일로 인해서 쉴 수밖에 없었죠. 그 일 이후 격한 언어를 다 끊었습니다. 제가 투쟁적인 이미지도 많았고요. 그 계기로 고운 말 콘서트라고 장난기 있게 저와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지만, 중화된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말하는 대로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잖아요. 고운 말이라고 지으면 공연내용, 관객들의 마음도 고와질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주변 지인들이 ‘고운 말 콘서트’를 한다고 했더니, 정면 돌파하시는 군요. 라고 놀리더라고요 하하(웃음)
▶김장훈 콘서트 100회 "고운말 콘서트"
Q. 장훈 씨의 어린 시절과 어머니(김성애 목사)의 이야기가 궁금해요.
A. 저희 집은 원래 기독교 집안이 아니었어요. 불교집안이었어요. 저는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안계셨어요. 1남 2녀 중 막내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3학년 때까지 기관지 천식, 기립성 저혈압, 기관지염, 악성빈혈 등 허약체질이어서 병원신세를 많이 졌어요. 이후로 조금씩 건강을 회복했어요. 지금은 건강하죠. 저희 어머님이 너무 좋아하시는 말 ‘영육 강건’입니다. 제가 지금 ‘영육 강건’해요.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가장이셨죠. 어머니가 사업을 하셨어요. 단란한 가정은 아니었어요. 딱히 불만은 없었는데, 어머니가 아버지였고, 누나들이 엄마였기 때문에 항상 서늘했죠. 늘 외로웠어요. 그래도 시간은 흐르더라고요. 고등학교 때 가출을 했고요. 많이 방황했었죠. 가출이 출가로 이어져서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어요. 40여 가지의 직업도 경험했고요. 가장 든든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건 온갖 어려움과 바닥 생활을 경험케 해주셔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어린 시절 병원생활,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에 대한 갈망, 등 따시고 배불러도 노래할 수 있는 힘과 어렵고 힘든 경험들이 나의 노래의 영감과 재료가 되어주었죠. 평탄한 삶이었다면 지금 저의 노래의 느낌은 나오지 않았겠죠? 오히려 지금은 제가 살아가는 원동력입니다. 감사하죠.
어머니의 사업이 갑자기 망해서 어느 날 집에 차압 딱지가 붙여졌어요. 사업의 어려움을 통해서 어머니께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셨어요. 어머니가 절에 다니실 때도 저희는 절이랑 맞지 않는 것 같다고 하시면서 어머니께서 교회에 예배드리러 가라고 하셨어요. 어릴 적부터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죠. 주로 부활절, 성탄절, 크림빵이랑 계란 먹으려고 갔었죠. 하하(웃음)
모태신앙보다 아픔을 겪고 믿음 생활을 하면 더 절실해지는 것 같아요. 어머니께서 신학공부를 하셔서 전도사 임명받으시고, 대한예수교 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으시고 결국(일산 십 대 교회) 목사님이 되셨고, 어머니께서 교회를 하실 때 제가 하나님께 헌당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수 김장훈과 어머니 김성애 목사
Q. 소신과 신념에 부딪히게 되면 타협하지 않으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누구로부터 영향을 받으셨다고 생각하세요?
A. 제가 1991년에 데뷔 후에도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사고를 많이 쳐서 가요계에서 매장됐었어요. ‘내 사랑 내 곁에’ 가수 김현식 씨가 집안에서 아는 친한 형님이세요. 사촌으로 알려졌는데 사촌은 아니에요. 1990년 11월 1일에 세상을 떠나고 현식이 형님이 생전에 노래 잘하는 사촌동생이 있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어요. 형님이 떠난 후 음반기획사에서 수소문해서 저를 찾아오신 거예요. 1991년 10월 앨범을 발매했는데, ‘내 사랑 내 곁에’ 노래가 현식이 형님이 떠나고 1년 만에 우리들의 천국이라는 드라마의 백 그라운드 음악으로 깔리면서 다시 히트를 쳤어요. 300만 장이 팔리면서 대박이 난 거죠. 방송국에서는 사촌동생이 느낌도 비슷한데 가수라고 하니, 그 친구가 이 곡을 부르면 되겠다. 이곡을 부르면 앞날을 보장해주겠다는 제안을 했어요. 하늘나라 간 형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것 같아서 거절했어요. 스포츠신문사와 함께 MBC 방송국에서 그 당시 골든 디스크 대상을 수상했어요. 방송국의 힘이 어마했을 때였죠. 계속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거절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설마 신인이 방송 펑크를 내겠어? 임의로 판단해서 방송 관계자분들이 일을 진행했어요. 분명히 제 의사를 충분히 밝혔는데 강압적으로 끌고 나갔기 때문에 시상식 당일 가방을 싸서 도망갔어요. 소신이나 신념에 부딪히면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배경의 영향은 어머님(김성애 목사)이세요.
어려서부터 어머니는 뭐든 자율에 맡기셨어요. 친구들과 치고받고 싸우는 것을 혼내신 적도, 공부를 강요해본 적도 없으시고 다만 한 가지 절대 거짓말은 안 돼요. 또 사내로서 비겁하거나 치사하거나 구차한 짓은 하지 말라고 하셨죠. 이런 영향을 받고 살다 보니 "무릎을 꿇느니 서서 죽겠다"는 소신이 저에게는 있어요.
Q. 일산 십 대 교회를 헌당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A.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방황하고 엇나갔던 저의 모습에서 마음에 상처와 가시로 남으신 것 같아요. 제 나이 때의 청소년을 생각하면 훈이 에게 조금만 지혜롭게 양육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으셨겠죠. 책을 내셨는데 ‘아들아, 엄마가 미안해’라는 책을 내셨어요. 그래서 청소년 십 대 교회를 하셔야겠다고 목회의 방향을 정하신 배경이 된 것 같습니다. 전화번호도 13세~18세의 청소년 세대를 착안해서 1318이에요. 본당에는 청소년들이 주도적으로 예배를 이끌어가는 콘셉트에 맞도록 악기들이 세팅되어있고, (사)꿈 이룸과 함께 가출청소년을 도우셨어요. 요즈음은 가출청소년들의 수가 많이 줄어서, 지금은 학교폭력이나 학대 예방에 중점을 많이 두고 계세요. 오래전 어머니의 꿈이셨어요. 청소년 사역에 대한 꿈이 있으셨죠. 예전에 원당에 8만 원 월세에서 살았어요. 가수였음에도 집을 나와서 광인처럼 혼자 돌아다녔어요. 어느 날 집에 들어갔는데, 어머니께서 교회에서 성미를 얻어다 밥을 해서 드시고 물 한 방울 손에 묻히지 않으셨던 분인데, 낡은 화장실 청소를 하시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어요. 그리고 어떠한 가족 간의 사건을 계기로 1996년도에 노래라는 것이 인간을 노래하는 것인데 가족도 돌보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음악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족을 돌아봐야겠는 마음으로 항복하고 음반기획사를 찾아갔어요. 세 가지 조건을 제게 제시했어요. 방송 출연을 해야 하고, 싸움하지 말고, 고음 말고 모든 대중이 따라 부를 수 있는 곡을 불러라 기획사에서 원하는 조건대로 했죠. 결국에 기획사가 원하는 대로 됐어요. 어느 날 집에 갔는데, 어머니께 요즈음 뭐하면서 지내세요? 여쭤봤어요. 전도사 사역하실 때에요. 밤에 산에 후레시를 켜고 다니시면서 담배, 본드 흡입하는 청소년들을 전도하러 다니신다는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이야기를 듣고 소름이 돋았어요. 멋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 어머니이시지만요. 어머니는 청소년 교회를 하고 싶다고 고백하셨어요. 고향이 이북이셔서 이북 사투리로 제게 ‘너 나중에 돈 벌면 엄마 도와라’ 말씀하셔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어요. 1998년에 ‘나와 같다면’ 앨범이 성공했어요. 2000년에 다음 앨범 제 계약할 때 인지세 말고 계약금만 12억이었어요. 앨범 100 만장씩 판매될 때였으니까요.
계약금 12억을 받고 그다음 날 바로 어머니 계좌에 입금해드렸어요. 그 계기로 일산 십 대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일산십대교회 청소년들과 김성애 목사
Q. 인터뷰 진행하면서 장훈 씨 믿음의 확신이 강하다는 걸 느꼈어요. 경험한 영적 체험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A. 첫 체험은 군대를 방위를 나왔어요. 훈련소 첫 주 주일에 교회를 잘 가지 않아서 출석하지 않았어요. 옆방 내무반장님이 우리 방에 오셔서 머리박기, 얼 차례를 시키시고 괴롭히셨어요. 교회 나가지 않아 그 주에 엄청 후회했어요. 다음 주에 교회에 예배드리러 나갔죠. 찬양을 시키셔서 ‘실로암’ 찬양을 했는데 갑자기 제안에서 울컥하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두 번째 경험은 공황장애였던 것 같아요. 친구 집에 얹혀살았어요. 창문이 작았어요. 목이 아파서 약을 먹었는데, 자주 먹으면 안 되는 약이었나 봐요. 갑자기 심장이 죄여 오는 느낌이 들면서 두렵고 떨리는 거예요. 죽을 것 같은 거예요. 작은 창문 너머로 멀리 교회 십자가가 보여서 그 순간 하나님께 기도 했어요 ‘하나님 저 죽을 것 같아요. 살려주세요.’ 바로 회복이 되더라고요. 이러한 여러 가지 경험이 있어요. 하하(웃음)
Q. 장훈 씨의 신앙에 대한 생각과 섬기시는 교회가 궁금해요.
A. 굉장히 까칠한 성격이에요. 대중들한테 대들지 말자. 제가 기관, 힘, 권력, 돈 있는 사람들과는 부딪힘이 많아요. 어떤 경우에라도 인간끼리 수직적 구조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수직적 구조라고 한다면 저는 경기를 일으키는 성격이에요. 모든 사람은 수평적 관계라고 생각해요. 저 자신에게도 수없이 되묻고 반성합니다. 제가 수직적일 때가 있지는 않은지 말이죠.
20년 전에 소망교회에 출석했었는데, 정착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20년 만에 신용백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시냇가 푸른 나무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성전 건축도 중요하지만, 빈민구제에 많이 힘쓰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가장 좋은 전도는 하나님의 이름과 십자가로 빵을 나누고, 선을 행하고 구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예전 제가 대학교를 다니면서 ‘천 원의 도시락’이라고 밥 차를 사서 한 끼를 해결하는 대학생들이 많았어요. 그 취지를 살려서 나눔 프로젝트로 승화시켜서 직접 다니면서 하는데, 어느 개척교회에서 버스를 살 수 있는 비용 1억 2천만 원을 돕겠다고 했다는 거예요. 설마 개척교회에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교육관을 짓거나, 교회를 넓히는 데 사용하지 나눔 프로젝트에 사용될 버스를 살 돈을 지원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실제로 비용을 마련해 주신 거예요. 세상에 이런 목사님도 계시는 구나! 순간 감동했죠. 제가 필요하시면 교회에 가서 공연해드리겠습니다. 말씀드렸더니, 저를 불러주셨어요. 신용백 목사님은 결혼도 하지 않으시고 집도, 자동차도 없으시더라고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목회를 하시는 거예요.
교회 장로님들과 다른 성도님들이 뜻을 모아서 3천만 원을 더 마련하셔서 1억 5천만 원을 맞추어 주셨어요. 제 돈 2백5십만 원을 보태서 장학금 기부까지 함께했어요.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시고 제가 출석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죠.
▶본지와의 인터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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