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을 시작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설레임이라고 나는 정의한다. 어떤 미래가 올지 모르는 가운데서 어떤 일을 새롭게 시작하려고 할때 걱정도 있겠지만, 긍정적인 기대가 더 많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강서구 화곡동에 두 주 전에 개척된 ‘주님의교회’가 하루 하루 변
이번 주엔 시찰회 참석차 나는 이틀을 더 김포에 머물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주에 막 첫예배를 드린 S목사님이 개척하게 된 ‘주님의교회’를 방문해 보기로 했다. 내가 그 교회를 소개하고 중재했지만 나도 아직 가보지 않았었기에 말이다. 몇주전 일이다. 죽마고우인 친구로부
우리나라 속담에 누구의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주어는 부모가 될 수도 있고 어른이 될 수도 있지만 최근에는 아내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라는 말들을 많이한다. 그런데 나는 남편말 잘 들어서 떡(좋은일)이 생긴 일을 나
이번 주 금요일에도 우리 부부는 어김없이 대구역으로 가서 무궁화열차를 탔다. 처음엔 정말 지루하게만 느껴지던 완행열차다. 그런 기차 여행도 몇개월이 지나니 이젠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열차 좌석에 한시간 이상 앉아 있어 허리가 아프면 잠시 열차안을 벗어나서 연결복도
명절이지만 사역을 위해 남편과 나는 김포로 올라갔다. 천상 열차안에서 점심때가 지나가게 되니 도시락을 준비해가야한다. 전날 가족식사를 준비하고 피곤해서인지 좀 늦게 일어나서 마음이 바빠졌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점심은 챙겨가야한다. 더욱이 아침도 금식이니 점심은 제때
구정설 이틀전인 오늘은 가족식사를 하기로 한 날이다. 가족이 다 모인것은 아니지만 대구에 사는 아들네와 딸네 식구와 우리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우리가 사역하러 김포에 올라가기 때문에 막상 명절당일엔 우리부부가 대구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역하러 김포를 다녀와서
이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생일이 있다. 어머니로 부터 응애~ 하고 태어나면서부터 한사람의 존재가 이 지구촌 세상에서 드디어 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 친지들은 매 년 그가 혹은 그녀가 태어난 날을 기뻐하며 기념해준다. 어릴때는 가족이나 친지들의
소천하신 우리 어머니가 복동이였나보다. 지난 봄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나자, 어머니를 모시고 5년 동안 살던 아파트를 내놓게 되었으니 말이다. 마침 전세가 나가서 그동안 골치아팠던 빚은 갚게 되었지만 우리가 살집이 문제였다. 우리가 살집을 놓고 고민 하는것을 보고 조
K선교사가 노회의 시찰회신년하례회에서 은퇴기념패와 꽃다발을 받은 그날, 점심식사후 척사대회가 벌어졌다. 3명이 한조를 이루어 윷놀이가 열린 것이다. K선교사는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자 윷가락을 힘껏 공중으로 내던졌다. 주위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합창을 했다. “개~” 다음
긴문장을 읽을때는 쉼표가 있고 마침표가 있다. 문장에서 쉼표는 그야말로 잠시 숨을 쉬고 끊어서 읽는 것이다. 하지만 마침표는 문장의 내용이 다 끝났을때 종결 되었음을 알리는 부호이다. 2023년 12월31일 기준으로 노회의목사직에서 남편 K선교사는 은퇴를 했다. 감동적
53년생인 남편이 목사로서 정년은퇴를 하게 되었다. 평북노회 서부시찰 소속이었던 남편에게 2024년 갑진년(甲辰年) 신년하례식에 꼭 참석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은퇴하는 목사님들에게 은퇴기념패와 꽃다발을 증정하는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2024년 1월 9일 화요일 남편
얼마전에 우리 선교회를 다녀간 Z선교사님에게 성탄절카드동영상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카톡이 날라왔다. "너무 너무 아름다운 부부십니다. 두 분께서 부부세미나 사역하셔도 어울리실것 같습니다" 특히 for 선교사들 스리랑카에서 26년차 선교사역하고 있는 Z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올해는 교회에 성탄트리를 장식하기로 했다. 11월 중순이 되자 우리교회 안에서도 성탄트리 이야기가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교회는 지난해는 성탄트리 장식을 안했었다. 그런데 올해는 성탄트리 장식을 해야할것 같았다. 우리 교회에 나오는 4학년 초
남편이 고희(古稀)를 맞았다. C국에서 돌아오자 마자 김포 우리집에서 하루를 쉬고는 대구로 내려갔다. 삼남매가 다 대구에서 모이기로 했으니 아빠 엄마도 이번 아빠생신기념도 겸사해서 추석은 대구에서 쇠자는 자녀들의 의견을 존중해서이다. 아이들도 많고 집도 넓은 큰딸네집에
인생에는 생각지 않은 많은 변수가 있다. 1997년 C국으로 온가족이 들어갔을때 우리는 장기간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생각과 의지와는 상관없이 10년여의 시간이 지난후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나와 남편은 다시 C국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을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