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포동에서 목회를 시작하다.

콩깍지교회 담임 이형우목사

▲ 개포동 한울교회

봉천동 남서울 제일교회와 전농동 성덕교회에서 교육전도사, 성수동 신양교회에서 전임전도사를 거친 나는 목사고시를 치르고 안수를 받게 되었다. 이후 목사가 되면 새로운 임지를 구해야 한다. 나는 좀 더 부 교역자 생활을 하며 목회를 배우기 위해 큰 교회에 이력서를 내고 어는 정도 가능성을 보이는 두 교회 중 한 교회를 정하려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안산에서 개척교회를 하던 동기 최경일 목사의 딸이 지병으로 위독하게 되어 동기들 몇 명이 영동 세브란스 병원으로 위문을 가게 되었다.

장신대 신대원에서 공부할 때 열 명 정도 모여 기도 탑에서 기도하던 그룹이 있었는데 최경일 목사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가능한 몇 명이 개포동에서 목회하던 박신기 목사 교회로 모여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그때 함께 한 이들이 다섯 명인가로 기억된다. 그런데 차로 이동하던 중 박신기 목사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이번 주, 자기가 시무하는 한울교회에 와서 저녁 예배 설교를 누군가 해달라는 것이다.

자기는 청운교회 설교를 가기로 약속했고 최경일 목사가 대신 설교를 하기로 했는데 딸 때문에 최 목사가 금식기도를 하다 몸이 너무 안 좋아 못 오게 됐다면서 대신 설교를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런데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이신 문윤순 목사님과 상의해보고 허락하면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문 목사님 허락을 얻어 한울교회 강단에 섰다.

남자 집사님이 사회를 보셨는데 주일 저녁이어서 열 명도 안 되는 성도가 모였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박 전도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성도들이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면서 나더러 한울교회에 와서 교회를 맡아달란다. 자기는 청운교회로 가기로 했다면서, 당시 청운교회를 개척하신 이준만 목사님은 부흥사셨는데 미국에 집회를 다니시다가 당분간 미국에 가 있을 동안 교회를 맡아 달라 해서 반신기 목사님이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청운교회를 임시로 맡아 들어가셨다. 이제 막 목사 안수를 받고 청운교회를 맡은 박 목사도 대단한 분이다. 교회를 맡아 주면 들어와서 미국에 보내주겠다는 조건이었는데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았지만 결국은 박 목사도 다른 길을 통해 미국으로 들어갔다.
당시 한울교회는 강북제일교회를 담임하시던 故 윤덕수 목사님 아래 박신기 목사가 전도사로 일하던 중 5천만 원의 개척자금을 교회에서 빌려주는 형식으로 강남에 사는 성도 중 원하는 이들과 함께 박 목사를 도와 일부 교인들과 개척한 지 1년 정도 된 상태였다.

개척교회가 쉽지 않아서 힘들어하다가 미국행을 결심하고 나에게 교회를 맡아 달라 하니 너무도 황당한 말이었다. 나는 동기 목사를 대신해서 빈자리를 때우러 간 건데 무슨 개척교회를 맡으라는 말인가? 개척교회를 하려면 기도도 하고 준비도 해야 하는데 당장 결정해야 한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개척교회를 하려면 기도도 하고 준비도 해야 하는데 당장 결정해야 한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개척교회는 절대 못 한다. 개척교회는 내 체질이 아니다. 지금 다른 큰 교회 두 곳에 서류를 넣고 어느 곳을 갈까 기도 중이다. 거기서 더 훈련을 받은 후 기존교회로 가려 하니 두말하지 말라 거절했다. 서울에 와서 이관영 목사님을 도와 남서울 제일교회를 섬기며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기에 개척교회라면 진저리를 쳤다. 그런데 박 전도사의 청은 너무도 간절했다. 내가 안가면 한울교회는 파산할 수밖에 없다. “개척교회도 교회인데 교회 파산해도 좋겠냐. 그리고 자기가 보기에는 이 목사가 한울교회 적임자다. 이 목사처럼 부드러운 성품의 목회자가 와야 이 교회가 산다. 그러니 딱 자르지 말고 기도해봐라”라고 계속해서 나를 설득하는 말에 갈등이 생겼다. 그래서 엎드려 기도했다. ‘하나님, 나는 가난한 지역에 들어가 어려운 이들과 함께 아픔을 나누며 살기를 원했는데 무슨 강남의 개척교횝니까? 나는 마음도 약하고 추진력도 부족해서 도저히 개척교회는 못합니다. 내가 개척교회 섬기며 얼마나 마음고생 했는지 하나님은 아시잖아요. 난 못해요. 다른 이를 그리 보내세요.’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그래 너 편하려고 큰 교회 부 교역자로 가려느냐? 그 교회는 네가 필요해서 보내려는 것이니 딴소리 말고 그리 가라.’ 결국, 나는 아버님께 자문을 구했다.

“나는 큰 교회로 가려는데 동기가 자꾸 그리로 나를 오랍니다. 어떻게 할지, 기도 좀 해주세요.” 아버님은 즉시 말씀하셨다. “그리 가는 것이 하나님 뜻이니 그리 가라.”

결국, 나는 목사 안수를 받자마자 한울교회 담임목사로 갔다. 한 달 사례비 34만 원, 사택도 자비로 얻어야 하고 그 이상은 교회 재정으로 감당이 안 된단다. 그래서 700만 원 보증금에 15만 원 월세를 얻어 13평 아파트로 부모님과 막냇동생 명숙이까지 7식구가 들어갔다. 교회 차도 없어 우리가 중고차를 사서 운영하고 아버님이 운전을 해주셨는데, 나중에는 형편이 안 돼서 11평으로 이사 가니 아버님이 도저히 불편해서 견디실 수 없다면서 광주 기도원으로 가셨다. 그리고는 쭉 안성 요양원에 머물다 돌아가셨다. 아들 목회 때문에 고생만 하시다 가셔서 생각하면 늘 마음이 짠하다. 당시 차들은 수동이어서 중고차를 사니 얼마나 고장이 잘 나는지 수리비에 기름값에 아내가 교사로 받는 월급을 가불해서 쓰고 월급날은 한숨을 쉬는 날이었다. 85년에 부임해서 92년 12월 지금의 한울교회 유치원을 분양받아 교회 뒤편에 작은 방을 내고 이사할 때까지 7년간 6번이나 이사했으니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지만 그런 생활은 별로 힘들지 않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히시더라’(마8:20) 이 말씀이 그때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다.  


▲ 개포동 한울교회   원로  이형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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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라 기자 다른기사보기